[오늘 해 본 생각] : Good Friday

종교력에서 고난주간은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에서 시작해 부활주일 전날 토요일에 마칩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금요일이 특히 중요합니다. 한국인들은 그 날을 보통 성금요일 즉 Holy Friday라고 부릅니다. 경건한 목적을 위해 '분리된 금요일'이라는 뜻입니다.
독일에서는 Karfreitag, 즉 애도 금요일로 부릅니다. 애도는 사람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지요?
그런가하면 미국에서는 이 날을 Good Friday라고 부릅니다. Good Friday요? 성금요일, 애도 금요일은 이해가 가는데 아니 어떻게 좋은 금요일입니까? 한 청년이 천 조각으로 자기 몸 하나도 가리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날을 Bad Friday 혹은 Terrible Friday로 불러야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Good Friday가 맞습니다. Good Friday는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한 획이 그어진 날입니다. 이 날 예수가 죽고 3일후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한 사건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이보다 더 절망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죽음은 죄의 삯입니다. 부활은 죄와의 전쟁에서 승리가 선포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앙으로 연합된 자들의 미래의 부활을 보증하는 증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의미를 로마서 6장에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라고 설명해 줍니다. Good Friday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은 너무 처참했지만 바로 이 점이 그의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 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려면 하나님의 아들의 용서하시는 보혈이 필요했을 정도로 우리가 정죄 아래 있었던 죄인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시편 85편은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는 날'을 노래합니다. 십자가는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와 무죄하신 예수의 우리를 향한 자발적 사랑이 희생을 통해 만난 장소요 증거입니다. 그가 자발적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댓가를 대신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그가 받으시고 그의 의를 그를 믿는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습니다.
가상7언은 전통적으로 1. 용서의 말씀, 2. 구원의 말씀, 3. 관계의 말씀, 4. 포기의 말씀, 5. 고뇌의 말씀, 6. 승리의 말씀, 그리고 7. 재연합의 말씀으로 분류됩니다. 아주 짧은 7번의 말씀들입니다. 왜 그 길이가 짧았을까요? 그 이유는 질식(asphyxia)과 연관되는데 죽음이 가까울수록 공기를 흡입하며 말하기가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입니다.
예수의 몸은 여섯 시간 이상 십자가 위에 있었습니다. 어두움이 오기 전 세 번에 걸쳐 용서, 구원, 그리고 관계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두움 안에서는 포기의 말씀을 하셨고, 어두움 후에는 고뇌, 승리, 그리고 재연합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이고 넓이입니다. 복음서들의 기록을 보면 십자가 이전에도 조롱당하시고, 무시당하시고, 무섭게 고문도 당하셨습니다. 슬픔의 길을 따라 골고다로 걸으실 때 사순절 중세 기독교 전통에는 14번이나 넘어지셨다고 합니다.
로마인들은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려 죽음을 유도했습니다. 매장은 보통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형 전에는 가혹한 매질이 있었습니다. 전체 십자가 보다는 라틴어로 파티부름으로 불리는 십자가의 가로 목재를 매고 가게 했습니다. 십자가 하나의 무게는 135킬로그램이 넘었고 가로 목재만도 35-60킬로그램은 족히 나갔습니다.
백부장의 지휘 아래 보통 네 명의 군인이 한 조가 되어 십자가형을 전담했습니다. 요즘은 못이 기계로 다 만들어지지요? 못으로 번역되지만 당시는 대장장이에 의해 하나씩 만들어진 13-18센티미터 정도의 철 스파이크를 죄인에게 사용했습니다. 주후 1세기에 만들어진 못들을 저는 예루살렘에 있는 박물관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추종자 6천명을 아피안 군사도로를 따라 카푸아에서 로마를 향해 십자가형으로 죽였던 예는 유명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따라 유태인들을 십자가형으로 죽였던 것도 유명합니다. 똑같은 모습으로 죽이는 것에 식상해 때로는 이상한 체위로 고정시키고 죽였던 사실도 역사는 오늘도 살아 증거합니다. 시신은 독수리 잔치로 끝내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신앙의 기초입니다.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이 예수의 미션의 요약입니다.
1. 용서의 말씀입니다. '아버지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원수를 위해 중보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초점입니다. 우리 죄가 용서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입니다. 고통의 정점에도 사랑이 승리합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 기도는 무지한 자들을 위한 입장옹호이지 죄를 무효화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신앙 없이 용서는 없습니다.
2. 구원의 말씀입니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에는 구원이 있습니다. 회개한 죄인은 천국으로 초대됩니다.
적어도 네 가지의 부정이 있습니다. 1. 먼저 연옥(purgatory)에 가서 단련 받은 후가 아니라 그 날 즉시 낙원에 갑니다. 2. 선행이나 세례나 의식(sacramentalism)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3. 모두가 구원 받은 것(universalism)이 아닙니다. 두 강도 중 회개한 하나만 구원 받았습니다. 4.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잠드는 것(soul sleep)도 아닙니다. 본절의 암시는 낙원에서 의미있는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긍정도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구원은 단순합니다. 진실로는 강조입니다. 오늘은 시간입니다. 네가 나와 함께 있을 것이다는 약속입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한 강도는 그 날 개념이 아닌 장소로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강도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이 사람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예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3. 관계의 말씀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책임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4. 포기의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 내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에는 대속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두움이 덮었을 때 하셨습니다. 루터의 지적처럼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하나님을 인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순간입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이 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고통을 우리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5. 고뇌의 말씀입니다. '내가 목마르다.'.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채찍에서 찢어진 몸이, 머리 위 눌러씌운 가시 면류관이, 십자가에 박은 못이, 3시간은 걸려 골고다까지 가시며 잃은 보혈이 할만큼 기능을 다했습니다. 온 몸의 채액이 다 빠져나온 것입니다.
6. 승리의 말씀입니다. '다 이루었다.'.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에는 승리가 있습니다. I am finished가 아닙니다. It is finished!!입니다. 다 갚았다, 다 완성했다, 다 끝냈다입니다. 인류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입니다. 구약에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40-60여개의 주된 예언들이 있고 이에 따른 270여개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예수는 앞으로 이루어질 예언들을 제외하고 십자가까지의 예언들을 이 날로써 다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은 채찍질을 당하셨고 등의 물리적 고난을,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들에게 거부당한 정신적 고난을, 그리고 인류의 죄가 그에게 주어지고 하나님에게 버림 당한 영적 고난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7. 재연합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리스도가 달리신 십자가에는 영원한 보장이 있습니다. 최후에도 확신이 있으십니다. 죽은 후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전제입니다. 본래 오신 곳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도 이 말씀들이 영감을 주며 생동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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